순천視聽覺아카이브 Suncheon AudioVidual Archive 1930s_신정사진관, 비너스사진관, 미광사진장, 순천사진관
자료명 사진관 압인이 있는 사진 생산자 각 사진관 생산년도 1932년(비너스사진관, 미광사진장), 1934년(순천사진관) 형태 원본/복사본 디지털 이미지 소장/자료제공 한국컨텐츠진흥원, 순천중앙교회, 개인
* 사진 이미지 중에는 전체 프레임 사진과 부분 확대 사진의 출처가 다른 경우도 있다. 이 웹페이지에 사용 가능한 이미지 중에는 여러 번 복사된 디지털본이 많아서 대개가 화질이 떨어진다. 개인이 소장하고 있는 사진은 아직 전체 이미지를 사용할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출처가 다른 ‘같은 사진’이 사용되었다. 제시된 4장의 사진 모두 아직 원본은 찾지 못했거나 확인하지 못했다.
순천의 사진관 순천에 사진관이 언제 처음 등장했는지 전하는 기록은 아직 없다. 1920년대부터는 전국 각지에서 조선인이 개업한 사진관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순천에서도 이 무렵을 전후로 사진관이 하나 둘씩 출현했을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온라인에 떠돌고 있는 일제시기에 제작된 엽서사진 2장과 사진첩에 날인된 ‘평정사진부(平井寫眞部)’가 가장 이른 시기 순천에서 영업을 했던 사진관으로 현재까지 확인되었다. ‘평정(平井, Hirai)’이라는 성을 가진 일본인이 운영을 했을 것이다. 아직 정확하지는 않지만 1910년대 중반을 전후로 영업을 시작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1930년 조선총독부가 조사/발행한 『조선국세조사보고:소화5년 도편 제5권, 전라남도』에 따르면 전국에 총 1,887명의 직업 사진사가 있었고, 전남에는 136명, 그 중 순천에는 8명(남 7, 여 1)의 사진사가 조사되었다. 전남에서 순천은 광주(31명)와 목포(26명) 다음을 기록했다. 조선인과 일본인 등을 통합한 수이고, 남 여 구분만 확인할 수 있다. 이들 8명의 직업 사진사 중에는 사진관을 운영했을 가능성도 있지만, 기관에 속해서 일하거나 독립적으로 활동했을 가능성도 있다.
2018년부터 현재까지 각종 자료와 인터뷰를 기본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가장 이른 시기부터 1960년대까지 순천에서 영업을 했던 사진관은 다음과 같다. 평정사진부, 신정사진관, 태양사진관, 비너스사진관, 미광사진장, 순천사진관, 무지개사진관, 성산사진관, 가네다사진관, 아세아사진관, 광사진관, 문화사진관, 시민사진관, 제일사진관, 미영사진관, 럭키사진관, 중앙사진관 등 17개이다. 여기서 1930년대에 촬영된 4개의 사진과 그 사진관을 소개하려 한다. 4개의 사진 하단에는 각각 신정사진관, 비너스사진관, 미광사진장, 순천사진관의 압인이 날인되어 있다.
01-1. 벽소 이영민 국악인 사진아카이브: 박춘섭_신정사진관(申正寫眞館) ![](https://lh4.googleusercontent.com/AGDQ2hBbSD34IOpKAZiMxUkMBkJoamlsggJXtWi9NX4i2gqDRc_TMOns-kHyN3zjGj9UHxDP8wcResJGc3OqgfDNtTWfRpIiM-x09H_PYCvkVvtAAXvLU--WZAoh6Keq4FeUAsnK)
이미지 출처: 제정화, 벽소 이영민 <순천가> 연구, 석사논문, 2013, 디지털본
01-2. 개인 소장 사진(원본의 복사본)_우측 하단 압인 부분 확대 ![](https://lh4.googleusercontent.com/or1LMQE3htT4Q4urG36NnIh7qToDv--xUPA6iCcpEwC1cEvxWDyqH7PcoO_IPKlB0taZYARCycAsRTHwhb8n4rIWJKF-ExeEcjUc_zdnmYcSVk4YOyz1S7Wb0CC4iVyf8i8TF8JR)
사진 제공: 개인
위 사진 01-1은 가야금 연주자 박춘섭을 찍은 사진이다. 의자에 앉은 인물 우측에 서예족자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마지막에 벽소(碧笑)라고 쓰여 있다. 벽소는 순천 출신 사회주의운동가·한학자·서예가였던 이영민(李榮珉, 1882-1964)의 아호다. 벽소는 순천에 국악인들을 초대해서 연주를 듣고 난 후에 관극평(관극시)을 한시로 짓고 직접 글씨를 쓰거나 간혹 다른 사람이 쓴 후에 해당 국악인과 글씨를 나란히 배치해서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겼다. 위 박춘섭의 사진은 그 중에 하나다. 사진 촬영은 사진관 실내에서 이루어진 것이 많지만, 위 사진처럼 실외 촬영도 있었다. 인화된 종이 사진 하단에 사진관 로고가 압인으로 찍혀 있는 사진은 현재까지 총 7장을 확인했다. 박춘섭의 사진 좌측 하단에 도드라진 압인이 찍혀 있다.
申正寫眞館 (S *마크) . SHIN SHO.
한자와 영문 표기를 함께 디자인한 ‘신정사진관’ 로고이다. 영어 발음 ‘신-쇼’가 ‘申正’의 일본 발음일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것이 이름인지 이름의 뜻풀이인지 알 수 없다. (일본 이름의 발음은 같은 문자를 쓰더라도 이름을 지은 부모님이 처음 소리낸 발음을 쓰기때문에 문자만으로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신-쇼’라는 발음때문에 일본인이 사진관의 주인이라는 가정이 유력하지만, ‘신정’이라는 이름의 조선인일 가능성도 있다. 이럴 경우 ‘신-쇼’는 더더욱 미궁으로 빠진다.
신정사진관 압인이 찍힌 사진은 현재까지 총 4장이 확인되었다. 벽소 이영민의 사진아카이브 중 박춘섭과 김염운의 사진 2장, 저전동성당이 보관 중인 사진첩에 ‘부활축일’ 기념사진 1장, 그리고 순천축구팀 사진 1장(김수웅 소장)이다. 이 4개의 사진 중에 부활축일 기념사진 뒷면에는 “1934년 3”이라고 적혀있어 날짜를 확인할 수 있었다. 1930년대 중반에 신정사진관이 순천에서 영업을 하고 있었다는 건 확실하다. 순천축구팀도 1930년대 초중반에 활발한 활동을 보였다. 문제는 박춘섭과 김염운의 사진 촬영시기인데, 각각 1946년과 1920년으로 제시하는 기록이 있지만((사)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판소리진흥회 순천지회) 근거자료가 없고, 면밀한 조사 분석이 아니다. 박춘섭과 김염운의 생몰년도 또한 정확히 밝혀진 자료가 없다. 그렇지만 신정사진관이 1920년대에 이미 운영 중이었고, 1940년대에도 계속되었다고 추정하지 못할 근거 또한 아직 없다.
02-1. 제7회 순천로회조력총회(1937.3.12)_비너스사진관 ![](https://lh4.googleusercontent.com/NObTHl71nimL4M1EpHYISp8zq5fP1UuxAeYsnM7sykATUjsLzP-PcYLHHVgCTTrmcl3rHx3ngb-iUbtpv2ZGWiQJBmdw58sKZEua3lYWvOLRdPzIBIyg-db_yRFPXabmqzCj4lgx)
이미지 출처: 순천중앙교회 홈페이지(*2020년 12월 현재 이 사진은 홈페이지에서 찾을 수 없다.)
02-1. 위 사진 좌측 하단 압인 부분 확대 ![](https://lh4.googleusercontent.com/em_czPTmPfG3OVNNmuUWayCl8nwE_vS-icn1sT-EiLkAGA8HEA5aUAH57QCKgWAXLi3mZ1MAooH940jylJCfRatvRH-6IiHeKYxMVxK8FABEoEEFSky4Fn7sbCEv8-2wsXEmJqiI)
사진 02-1은 몇 년 전 순천중앙교회 홈페이지에 공개되어 있던 것을 예술공간 돈키호테가 복사해 저장해 둔 것이다. 2020년 12월 현재는 중앙교회 홈페이지에서 이 사진이 사라졌다! 교회측에 아직 문의해보진 않았다. 사진 우측 하단에는 이 사진에 대한 기본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제 칠 회 순천로회조력총회 1937.3.12
1937년 3월 12일 순천노회가 제7회 조력총회를 기념해서 찍은 사진이다. 모두 여성들이고, 외국인도 4명이 보인다. 가슴에는 모두 동일한 배지(badge)를 달았다. 사진이 촬영된 장소는 순천중앙교회 뒤에 위치한 조지와츠기념관(순천기독진료소) 입구 앞이다. 뒤로는 매산학교가 있고, 당시에는 담장이 없어서 학교로 가는 오르막길과 지금도 웅장하게 서 있는 큰 나무가 보인다. 멀리 미끄럼틀 같은 구조물이 있는데, 주위로 몇 사람의 모습이 작게 보인다. 사진이 촬영된 1937년은 매산학교가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를 거부하며 자진 폐교한 해이다. ‘순처로회조력’은 어떤 단체였을까? 1920년 미국 장로교 부인조력회장 윈스브로우(W.C. Winsborough)가 한국의 호남선교부를 방문한 것을 계기로 전주, 군산, 목포, 순천, 광주 등지에 ‘부인조력회’가 창립되어 활동을 했다. 순천에서는 1929년 서서평(徐舒平, Elisabeth Johanna Shepping) 선교사, 김필례, 엄연숙이 순천을 찾아 조력회의 취지와 운영 방법을 교육함으로써 (부인)조력회가 조직되었다고 한다. 제1회 총회는 1932년 6월 3일에 순천성경학교에서 열렸다. 순천노회 산하 단체로서 ‘순천로회조력’으로 불렀던 것 같다.
사진 좌측 하단을 자세히 보면 일본어와 영어로 표기된 압인이 보인다.
ビナス 寫眞 VENU ENU
사진의 디지털 이미지 크기가 작아서 앞 뒤 음절이 잘 보이지 않지만, 일본어 ビナス(원래 표기 ビーナス)와 영문자 VENU를 유추해 보면 ‘비너스’라는 게 명확해진다. 비너스사진관에 대해서는 앞서 「기록과 증언으로 보는 순천의 사진관:1920년대~1960년대」(박혜강, 동남사진문화, 2019)에서 소개된 바 있다. 일제 시기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운영됐던 것으로 당시 조사되었다. 벽소 이영민의 국악인 사진의 대부분을 비너스사진관의 김홍석 사진사가 촬영했다는 증언자료(임성래 논문, 1999)와 1959년에 비너스사진관에서 촬영한 사진을 제공 받았고, 비너스사진관의 주인 하태화 사진사에 대한 195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의 기억을 몇 사람에게 들을 수 있었다. 현재 남교오거리에서 제일현상소사진관(제일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조익준(1942~) 대표는 1958년부터 2년여 간 비너스사진관의 ‘하태화’에게 사진 기술을 배웠다. 하태화는 그 당시 환갑을 넘은 나이였다고 한다. 그러나 조익준은 비너스사진관이 언제 개업을 했는지, 하태화가 어떤 배경에서 비너스사진관을 운영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다.
03-1.벽소 이영민 국악인 사진아카이브: 조몽실_미광사진장(美光寫眞場) ![](https://lh6.googleusercontent.com/I05p1xhFkvRFFEA10oqJtyoRzgBecu5tyeYzGszMP-9Ndxi8jf4aXcrO0Omq_AVOklPVF6XVOLd3QDTVgH3xV90bC5q5I-W6Ycqhl4vi114_bluFaqulrA-P-qcTblXU0kPZ8HoQ)
이미지 출처: 한국컨텐츠진흥원
03-2. 개인 소장 사진(원본의 복사본)_하단 좌측 압인 부분 확대 ![](https://lh3.googleusercontent.com/88sro8IsvWzmEFw6XiQrztjeVrerox9h2vFoqGfJWH4HXKrHGyBLxSLle0bF432KtUWu5l0wgnlSfiG8MPh_YxsepqfSCNuIijZMhBulWTmvIVs6AUrZdLPxiZAlKf2sMxKMuKEx)
사진 제공: 개인 이미지 03-1은 화순 출신 판소리 명창 조몽실(1900-1954)을 촬영한 사진이다. 벽소 이영민의 국악인 사진아카이브의 전형을 따르는 인물사진 중 하나다. 이 디지털이미지는 한국컨텐츠진흥원 문화컨텐츠닷컴으로부터 제공받았다. 문화컨텐츠닷컴이 제공하고 있는 국악인 사진 이미지 중에 벽소의 사진아카이브는 모두 14개(김소희, 김연수, 김창룡, 박녹주, 박초월, 백락준, 송만갑, 이동백, 이화중선, 임방울, 정광수, 정응민, 정정렬, 조몽실)이다. 예술공간 돈키호테는 컨텐츠닷컴측에 이 14개 이미지의 원본 제공처와 제공자(저작권자)를 문의했다. 담당자의 답변에 따르면, 한국컨텐츠진흥원 산하 문화컨텐츠닷컴이 스타트를 하면서 주제별 컨텐츠 조사·수집용역사업을 진행했고, 우리가 문의한 ‘컨텐츠’ 해당 용역사업의 총괄을 어떤 대학교수가 진행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컨텐츠닷컴이 소장하고 있는 14개의 국악인 이미지는 그 용역사업의 결과보고서에 첨부된 수집자료들의 일부이고, 그 자료들의 개별 출처(혹은 metadata)를 (시간이 많이 지나) 현재는 알 수 없다고 했다. 문화컨텐츠닷컴이 제공하고 있는 14개의 이미지는 해당 홈페이지>>문화원형 라이브러리>>음악>>한국 근대음악 이야기에서 볼 수 있다. 이미지 자료의 제작년도는 2004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돈키호테는 컨텐츠닷컴에 문의하기 전 또 다른 자료 하나를 이미 확인했었다. 1988년 12월, 중앙일보사는 『국악의 향연』 전 5권과 음반 50장을 엮어 『한국전통음악대전집』을 발간했다. 전집 가운데 『국악의 향연 3』은 정가, 판소리, 단가, 민요, 잡가 및 선소리를 소개하고 있다. 이 책 47-49 페이지에는 벽소의 국악인 사진아카이브에 속하는 14개의 사진 도판이 실려 있다. 컨텐츠닷컴이 제공하는 14개의 이미지와 (원본에서 편집된 인쇄용) 프레임, (마치 컬러 사진 같은) 색감, (원본 사진 표면에 있었을) 사용감 등등이 흡사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다. 조사용역을 진행했던 그 교수는 이 책을 참조한 것일까? 아니면 중앙일보사에서 제공을 받은 걸까? 중앙일보사에 문의했지만, 신문사는 반년이 넘게 32년 전 이 책의 데이터에 대해 답변을 할 담당 부서를 찾지 못하고 있다. 49 페이지에는 사진에 대한 설명 말미에 원 생산자와 소장자를 밝히고 있다.
이상의 명창 사진들은 1930년대에 찍은 것으로, 당시 전남 순천의 사대부였던 이영민(李榮珉)씨가 이들과 교류하며 기념사진으로 찍었던 사진들이다. 현재는 그의 조카인 이정규(李禎圭)씨가 소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인쇄된 ‘선명’한 사진을 직접 봤거나 제시하는 사람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문화컨텐츠닷컴이 용역결과보고서로 제공 받은 디지털이미지는 아쉽게도 『국악의 향연 3』에 수록된 도판의 화질에 한참 못 미친다.
朝鮮 順天 美光寫眞場
조몽실의 사진 좌측 하단에는 사진관 압인이 찍혀 있다. 돈키호테가 2018-2019년 순천의 사진관에 대한 조사를 할 당시에 ‘미광사진관’에 대한 기억들이 흘러나온 적은 있으나 확인할 자료가 없었다. 단지 사람들의 기억 속 위치를 더듬어 추정 컨데, 현재 시민로에 있는 신라표구점 2층, 내모습사진관 자리와 겹쳐질 뿐이다. 아직 내모습사진관을 방문하지는 못했다. 조몽실의 사진 외에 미광사진장의 압인이 박힌 3장의 사진을 추가로 확인하였다. 『영흥교회 100년사』(2012)에 수록된 1948년과 1949년에 촬영한 학생 단체사진 2장과 (재)뿌리깊은나무가 소장하고 있는 한창기의 순천중학교 3학년(1953년) 시절 독사진 1장에서다.. 『영흥교회 100년사』는 순천시립기독교박물관에 문의해 열람할 수 있으며, 한창기의 사진은 순천시립뿌리깊은나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한창기 사진의 촬영년도는 1954년일 가능성도 있다고 박물관 학예사가 전했다. 1950년대 중반까지의 흔적을 볼 수 있는 미광사진장은 언제부터 운영이 되었을까?
조몽실의 사진에는 간지로 촬영년도가 1932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는 조사기록이 있다((사)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판소리진흥회 순천지회, 2003). 그의 나이 33세에 순천에 와서 공연을 했고, 공연 후 벽소의 권유로 미광사진장에 가서 (벽소의 한시와 나란히) 촬영에 응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사진 속 조몽실의 얼굴을 가만히 보면 30대 초반의 나이로 보이지 않는다. 아직 보지 못한 간지 기록을 더 의심하는 것이다. 04-1. 벽소 이영민 국악인 사진아카이브: 정광수_순천사진관(順天寫眞館) ![](https://lh3.googleusercontent.com/tq7YPz3hBV7JzvlEvprQEz4gD1k90OORLNiNf-B_Y5LfFblvPyTaQ4Mn0jyo4XmJMy7fKltVLpMbiaT7NwQye9cFyRPpVht00uhScD5EqKhqbdb8luXN8XiEuls4P5K0Lb0as3xz)
이미지 제공: 한국컨텐츠진흥원
04-2. 위 사진 좌측 하단 압인 부분 확대 ![](https://lh4.googleusercontent.com/w6wBQQZ78L7gLADsAHaTd8-fFcIHjTvmovTttSc9PPH-Kqen4Fc254CQaLgKQW2LaRIq9Zb3PcQorLTD1jG9Wz0sufnqL4oaleatRZWiDfRqUoVtETYBPGmwgYZMYrofI_hMjXk4)
사진 04-1 또한 위 조몽실의 사진 이미지의 서사 경위와 동일하다. 벽소의 사진아카이브 목록 중 하나이고, 『국악의 향연 3』에 도판으로 수록되어 있으며, 현재 문화컨텐츠닷컴이 소장/제공하고 있다. 사진 속 인물은 나주 출신의 정광수(1909-2003) 판소리 명창이다. 이 사진은 조몽실의 사진과 다른 게 하나 있다. 벽소가 지은 한시가 적힌(정청하 書) 종이와 정광수는 같은 시간과 장소에 존재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사진 우측 상단의 글씨(종이)는 이미 인화된 사진 위에 이후에 붙여졌고, 그것을 다시 촬영한 완성본이 위의 사진이다. 벽소 이영민은 이러한 콜라주(Collage) 형식의 국악인 사진아카이브도 여러 장 남겼다. 대상이 되는 국악인과 사진을 촬영할 기회를 만들지 못했을 때 벽소는 이런 저런 자료를 찾기도 하고, 주변 사람에게 수소문도 했을 것이다. 하동 출신의 판소리 명창 이선유(1872-1949)의 사진콜라주 이미지를 보면, 벽소의 한시가 쓰인 종이 위에 이선유의 얼굴 사진이 타원형으로 오려져 붙어 있다. 이 이선유의 사진은 1931년 조선가요연구사가 발행한 『정선(精選) 조선가요집』에 실려 있다. 인쇄물에 실린 당대 음악인들의 사진을 가져와서 자신의 한시평과 나란히 기록을 해둔 것이다. 이선유 외에 사진들의 출처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같은 기법의 아카이브에는 김여란, 김종기, 김초향, 백낙준, 신숙, 이중선 등의 것이 있다. 벽소 이영민의 국악인 사진아카이브의 형식적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이 사진콜라주 방법론이라 할 수 있다. 위 정광수의 사진콜라주는 이선유의 그것과는 반대다. 이선유의 사진은 벽소의 글씨 바탕 위에 작게 (마치 낙관처럼) 붙어 있다면, 정광수의 것은 인화된 원본 사진 위에 한시가 쓰인 종이를 오려 붙였다. 그런데 묘하게도 사진 속 정광수의 뒤 벽면에 실제 글씨가 걸려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2003년 (사)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판소리진흥회 순천지회는 자료집 『벽소 이영민 선생과 판소리 무형문화유산의 발자취』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정광수 명창과 대담을 진행하고 약식 녹취 본을 기록해두었다. 정광수는 사진에 대해 “벽소 선생님께서 찍어주셨다”고 말했다. 여기서 벽소가 직접 카메라로 촬영을 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벽소가 사진관으로 데려가 금액을 지불했다는 뜻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건 정광수가 사진을 촬영할 때는 왜 조몽실의 사진에서처럼 한시 족자를 걸지 않았던 걸까? 미처 글을 써 놓지 못한 걸까? 정광수는 이 사진의 촬영 년도를 기억하고 있었다. 1934년이었다.
1934년 어느 날, 벽소 이영민과 정광수가 사진을 찍으러 간 사진관은 어디였을까? 사진 좌측 하단에는 ‘順天’이란 글씨가 크고 선명하게 보인다. 우횡서로 디자인된 도장이다. 정광수의 사진 이미지에서는 전체 글자를 읽기는 어렵지만, 순천사진관 압인은 여러 기록 자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04-2-1. 종이 인쇄 도판 확대 이미지 ![](https://lh6.googleusercontent.com/lBOq8Fbk22LzQRE7mgvKj7qynPt4mEkGn5lWG05UtYMBOe1A1KKmurMGlSfnUseZMGVQgDAuF9sQrkGP-lkf9WX0KBWqAyY9n1121r0QvCnFCLfr9SEZO_xB4CL3Bn3EFM3vJdBl)
도판 출처: 1951년 종합체육대회 축구 우승 기념, 순천의 정겨운 옛사진, 순천시, 2007, p.200(소장처:국립순천대박물관) 국립순천대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1950년대 순천농림고등학교(국립순천대학교의 전신) 사진아카이브에는 순천사진관 압인이 꽤 많이 보인다.
館眞寫天順 町手大邑天順
위 압인에 사진관의 위치를 표기한 ‘순천읍대수정’에 주목해 보면, ‘대수정(大手町)’이라는 명칭은 일제 시기 상업시설이 많고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구역을 지칭했다. 순천읍 대수정은 현재 시민로를 기준으로 동북쪽 방향-순천의료원 앞 일대였다. 1946년 조명훈이 그린 <순천읍교통대지도>에 표시된 순천사진관의 위치(중앙로와 행중길이 만나는 삼거리 지점)는 1965년 <호남약도:순천시가>에서 현 랜드로바 자리(시민로)로 옮겨져 있다. 길에 면에 있었던 사진관 건물의 중앙로 확장 공사계획에 따른 철거가 예정되면서 미리 이전을 했던 건 아닐까?
05. 원본 스캔 이미지_1960년대 초반 순천사진관
사진 제공: 조익준(현 제일사진관 운영) 순천사진관 간판 전경이 보이는 사진 05는 1946년 조명훈의 지도에 표시된 위치에서의 60년대 모습이다. 현 제일사진관의 조익준 대표가 1960년대 초반 순천사진관에서 일할 때 찍은 사진이다. 당시 조익준의 고용주, 그러니까 순천사진관 주인은 김서종이었다. 김서종(아명 김정추, 1933~)은 김철우의 가네다사진관에서 사진 기술을 배웠다. 해방 후 가네다사진관이 아세아사진관으로 전환된 후에도 계속 일을 했고, 김철우가 1952년에 창업한 동남사진기공업사에서 직원으로 일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1950년대 말 혹은 1960년대 초반부터 순천사진관 운영을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에는 아세아사진관 자리(현 랜드로바 자리)로 순천사진관을 옮겨서 운영을 했고, 사진관 안에 순천예식장을 겸했다. 이후 중앙극장 사거리로 옮겨서 1972년까지 영업을 하다가 여동생의 남편에게 사진관을 넘기고 서울로 이사를 갔다. 서울로 올라간 김서종은 은평구에서 대조사진관을 새로 개업했고, 80년대까지 10여 년 운영을 하다가 문을 닫았다. 현재 가족과 함께 서울에 살고 있다.
원래 순천사진관은 김서종이 창업한 사진관이 아니었다. 김서종이 중간에 인수를 한 것이다. 1934년 정광수가 벽소와 함께 찾아갔을 때, 1946년 조명훈이 지도를 그리고 있을 때, 1950년대 초중반 순천농림고등학교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있을 때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었던 주인은 다른 사람이었다. 처음 순천사진관 문을 열었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벽소와 함께 온 정광수 명창을 촬영했던 그 사진사는...
그런데, 이러한 상상도 가능하다. 1934년 정광수가 촬영한 사진관은 순천사진관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상상. 정광수의 사진을 간직하고 있던 벽소는 어느 날 한시 평을 써서 사진 위에 붙인 다음, 순천사진관으로 가서 콜라주된 이미지를 촬영해(복사해)서 다시 인화해 달라고 했을지도 모른다고. 순천사진관에서는 고객의 요청대로 촬영하고 인화한 다음, 마지막에 저 압인을 찍어서 벽소에게 최종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이 상상 속에서는 정광수의 초상 사진이 촬영된 사진관과 순천사진관 사이에 길게 벌어진 시공간이 존재할 수 있다고. 참고자료 조선국세조사보고:소화5년 도편 제5권, 전라남도, 조선총독부, 1930 조선가요연구사, 정선(精選) 조선가요집, 1931 조명훈(이홍기·허석 해설), 순천의 경제 상황(1946), 순천시민의신문, 2003 국악의 향연3, 중앙일보사, 1988 임성래, 이영민 한시를 통해 본 판소리 명창의 세계, 1999 벽소 이영민 선생과 판소리 무형문화유산의 발자취, (사)유네스코무형문화유산판소리진흥회 순천지회, 2003 안기창, 미국 남장로교 선교 100년사:순천 지방을 중심으로, 진흥, 2010 영흥교회 100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영흥교회, 2012 박혜강, 기록과 증언으로 보는 순천의 사진관:1920년대~1960년대, 동남사진문화, 2019 디지털순천문화대전
이 콘텐츠는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전남문화재단이 후원하는 온라인미디어 예술활동 지원 ‘아트 체인지업(Art Change UP)’ 사업에 선정된 예술콘텐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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