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미술사총서
20세기 전남미술 개관
전남은 예향(藝鄕)으로 장구한 한국의 역사와 함께 오랫동안 예술의 역량을 키워왔다. 백제시대 영암에서 태어난 왕인박사는 일찍이 바다건너 일본의 문화형성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고 장성 백양사, 구례 화엄사, 순천 송광사와 선암사, 여수 흥국사, 해남 대흥사, 강진 무위사 등 많은 사찰들을 통해 불교 건축과 조각, 불교 회화가 꽃피웠다. 더불어 도자예술의 꽃이라 할 수 있는 고려청자의 상당부분이 강진 일대에서 만들어졌으며, 무안과 보성의 분청은 한국인의 미감을 잘 담고 있다.
전남은 멀리 삼국시대부터 국가의 존망과 위기를 여러 차례 겪으면서 시대정신과 시대의 감성을 예술로 승화시켜왔다. 전남미술은 서울로 대변되는 중앙미술과 경쟁하기도 하고 교류하기도 하면서, ‘호남미술’ 또는 ‘남도미술’의 미학과 정체성을 만들어왔다. 조선시대까지 행해진 유배라는 형벌은 섬이 많은 전남, 특히 제주를 포함해 진도, 신안, 완도 등의 서남권 지역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이 가혹한 형벌은 변방지역과 만나면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중앙권력으로부터 멀리 추방되어야 했던 유배인 가운데 일부는 남도의 자연과 민속을 관찰하면서 자신들의 학문과 예술을 새롭게 정립해 나갔으며 정치범이었던 유배인과 조심스럽게 교류·교감했던 지역은 유배인을 통해 인재를 키우면서 지역의 예술문화를 한층 높은 수준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강진의 다산 정약용(1762-1836), 진도의 무정 정만조(1858-1936)를 비롯한 대학자들과 문인이었던 송강 정철(1536-1594) 그리고 화순의 학포 양팽손(1488-1545), 해남의 공재 윤두서(1668-1715), 완도의 원교 이광사(1705-1777)와 같은 당대 출중한 서화가들이 전남 지역에서 자신들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완성했고 주변에 전파하였다. 이처럼 유배문화는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독특한 문화교류사라 할 수 있다.
남도미술, 그 가운데 남도회화와 남도서예의 씨앗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전남 서남해안 지역에서 싹을 틔웠다. 해남에서는 윤두서-윤덕희-윤용 3대로 이어진 해남윤씨 사실주의 화맥이 생겨났으며, 진도에서는 허유-허형-허건 3대로 이어지는 남화의 화맥이 형성되었다. 완도에서 생을 마감한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도 서예사에서 하나의 큰 맥을 만들었다. 진도출신 의재 허백련은 광주에 연진회(1938)를, 남농 허건은 목포에 남화연구원(1946)을 설립하여 각각 전남 한국화의 양대 화맥을 형성해 나갔고, “보성강물이 온통 설주 선생의 붓 행구는 먹물이었다”는 일화를 남긴 보성의 설주 송운회 (1874-1965)와 ‘서예’라는 용어를 정착시킨 진도출신 소전 손재형(1902-1981)은 근현대 서예를 전남에 확산시킨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반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전남 동부권은 지리적으로 가까운 경남, 전북권과 상호 왕래하면서 지역의 역량을 키워갔다.
'서화'와 '미술' 개념이 충돌했던 20세기 초반, 전남미술은 서화의 전통을 전승해가는 동시에 개항과 일제강점기를 거치는 동안 새로운 미술교과과정과 미술전람회와 같은 근대적 미술제도를 경험하면서 시대의 변화에 점차 적응해나갔다. 전남 최초의 서양화가로 밝혀진 여수출신 김홍식은 1924년 일본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배웠다. 이후 오지호(화순), 김환기(신안), 배동신(광주), 양수아(화순), 강용운(화순), 백홍기(목포), 백영수(수원), 문원(신안), 고화흠(구례), 문동식(영암), 천경자(고흥) 등 많은 전남출신들이 일본유학을 통해 근대미술을 배우고 돌아와 한국미술은 물론 전남미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이들의 출국과 귀국의 주요 기착지였던 두 항구도시 목포와 여수는 전남 근현대미술의 중요한 도시로서 다양한 미술활동들이 선진적으로 일어났으며 교류와 실험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개인의 활동 못지않게 미술단체를 통한 활동도 주목할 부분이다. 초창기에는 창립선언의 형태로 집단적인 조형이념의 추구를 표방하는 단체들이 두드러졌다. 이들은 차츰 새로운 조형이념의 등장과 도전에 의해 해체되거나 회원의 탈퇴 또는 회원 구성원의 변화 등으로 자연 소멸되는 경우도 있었다. 지역연고나 고등학교, 또는 미술대학 출신 동문을 중심으로 결성되기도 하고 장르별, 프로젝트에 따라 해쳐 모이기도 했다. 다른 측면에서는 하나의 이익집단으로서 미술단체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사단법인, 협동조합 등과 같이 정책-제도의 변화로 생겨나는 경우와 특정미션 또는 특정미술사업을 위해 ‘위원회’ 등의 이름으로 조직되고 한시적으로 운영되는 경우도 발견된다. 미술단체 역시 나이를 먹는 관계로 ‘청년’을 내세워 의욕적으로 출발하였으나 차츰 회원들이 고령화되어 자진 해체하는 경우도 있었다. 2000년대 이후 누적되고 있는 지역미술인구의 고령화 현상은 기성 미술단체에게는 큰 고민이 아닐 수 없다.
개인 작가들은 조형이념의 집단적 추구, 창작에 대한 자극, 인맥의 형성, 정보의 교환, 권익의 보호와 추구, 작품발표 기회의 극대화와 같은 경제적인 이유, 각종 지원과 후원의 문제 등 여러 동기에서 미술단체가 창립되고 회원으로 가입하여 활동하기도 한다. 정기성을 띠는 미술단체(회원)전과 지역에서 개인에 비해 미술단체가 대규모 전시나 행사에 초대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에 많은 작가들은 단체 활동을 통해 활동이력을 쌓아갈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단체운영의 비민주적인 운영이나 사업예산의 불투명한 집행으로 인한 잡음과 고발, 임원선출 과정에서의 과도한 경쟁 등은 단체 활동에 대한 회의감과 의구심을 가중시키기는 것도 사실이다. 비단 이것은 미술단체만의 특수한 문제는 아니다. 미술단체의 활동은 미술사적으로 그 비중이 약해진 것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지역미술사의 관점에서는 여전히 단체가 지역미술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초기에는 동우회, 동호회 등의 임의단체로 출발하였다가 점차 사단법인화를 통해 재창립되거나 분화되는 수순을 밟는다. 미술단체들은 흔히 지자체가 주최하는 지역문화축제 등에 초대되면서 기념전, 특별전 등의 형식으로 전시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점도 지역미술 활동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전남미술에서는 의재 허백련이 중심이 되어 1938년 광주에서 결성된 연진회가 가장 이른 시기에 조직된 미술단체라 할 수 있다. 연진회는 1976년 재정비를 거쳐 1978년 연진미술원을 개원하여 작가들을 배출하기도 했다. 목포지역에서는 1945년 창립된 목포미술동맹과 소전 손재형이 주도한 목포서화동연회, 전남 최초의 서양화 동인인 녹영회(1946)와 목포출신 청년작가들의 그룹 십대전(1958, 이후 ‘네오 라르’로 개칭)이 비교적 이른 시기에 결성된 단체들이다. 한국전쟁 중 광주에서 결성된 전남지구 종군화가단(단장 강용운, 부단장 천경자)은 국가의 정책에 의해 조직된 한시적 미술단체라는 점에서 특이한 사례이다.
대표적인 미술단체인 미술협회의 전남지역 창립은 목포미협(1959,허건)을 첫 시작으로 여수미협(1966,김용복), 순천미협(1970,주철수), 나주미협(1975,박형철), 해남미협(1988,김철수), 광양미협(1992,김선영), 진도미협(1993,곽국환), 구례미협(1997,구례미술동우회로 출발), 장성미협(2002,기치명), 보성미협(2006,박채성), 화순미협(2014,성치풍), 고흥미협(2015,곽형수)으로 최근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상 12개 지역의 미술협회는 한국미술협회 지부승인을 얻어 현재 (사)한국미술협회 지부로 등록되어 전남지회를 구성하고 있다. 한국미술협회 전남지회(현 지회장 나안수)는 1991년 전라남도와 광주광역시가 분리됨에 따라 재창립되었다. 초대 회장 박석규(목포)를 시작으로 강종래(여수), 양재영(순천), 손영선(목포), 최성훈(목포), 김선영(광양), 김용선(진도), 김상선(여수), 홍경수(순천)가 지회장을 역임했다. 한편, 한국미술협회는 1961년 정부의 예술단체 통합정책으로 기존의 대한미술협회와 한국미술가협회가 통합·발족하여 1962년 사단법인으로 등록되었다. 전남미협은 1962년 한국미술협회 전남지부 성격의 전남미술가협회(초대회장 강용운)의 창립으로 출발한다. 1991년 이전까지 광주미술계가 광주미협과 전남미협 두 단체를 실질적으로 조직·운영했다고 볼 수 있다. 지방자치의 문화적 소산이기도 한 전남지회는 2016년 현재 목포, 여수, 순천, 나주, 해남, 광양, 진도, 장성, 보성, 구례, 화순, 고흥 총 12개 지부를 대표하면서 지역순회전을 비롯해 경남지회와의 영호남교류전인 <남도의 향기전>, <전남청년작가전> 등 작품발표의 기회를 만들면서 작가발굴과 지역 간 미술교류의 장을 꾸준히 마련하면서 전남미술인들의 화합과 권익을 증진시키는데 힘을 쏟고 있다. 한국미술협회 지부 외에도 민족미술인협회 지부(목포, 영광, 여수), 예술인협회(무안, 담양, 화순), 협동조합 등 지역단위에서 지역미술인의 권익보호와 미술발전을 위해 중소규모의 미술단체들이 자생적으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참고로 이번 조사연구에서는 서예단체와 사진단체의 조사를 면밀하게 하지 못했음을 밝힌다. 이 분야에 대한 별도의 조사연구와 정리가 필요하리라 본다.
1965년 시작된 전라남도미술대전(도전)은 국전(1948~1981), 대한민국미술대전(1982~현재)과 함께 전남지역에서 가장 권위 있는 작가등단제도로 자리 잡았다. 2016년 52회를 치룬 전남도전을 통해 많은 작가들이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도전 추천·초대작가제는 원로와 중진작가들에게 작품발표의 기회를 보장해 주기도 하였다. 특히 전남도전은 한국화, 서양화 등 회화분야의 성장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악했던 조각이나 공예분야의 확장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전남도전과 함께 광주에서 열린 전매미술대상전(1977~1980)전남매일신문사가 주최했다, 무등미술대전(1985~), 광주광역시미술대전(1988~), 한국화특장대전(1989~)은 대표적인 전국규모 미술공모전으로 전남작가들의 주요 등용문이자 경력으로 작용하였다. 반면 ‘국전파행’ 뉴스와 같이 공모전을 둘러싼 운영과 심사에 관한 갖가지 시비와 잡음은 국전과 도전의 권위를 점차 약화시켰던 것도 사실이다. 심지어 '비국전파'를 선언하며 주류 공모전에 출품하지 않고 재야작가 혹은 비제도권 작가로 불리며 묵묵히 창작에 전념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사이, 전국적으로 약 300~400개의 공모전이 난립하게 되자 공모전은 차츰 미술대학을 졸업한 청년작가들을 중심으로 기피와 외면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결과 포트폴리오 심사를 통한 신진작가 (발굴)지원 프로그램과 같은 새로운 등단제도가 기성 공모전의 위상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전남도전을 비롯해 크고 작은 공모전은 여전히 전남작가들이 등단하고 경력을 쌓아가는 중요한 제도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참고로 현재 전남에서 진행되고 있는 주요 전국규모 미술공모전으로는 순천미술대전(순천,2000~), 소치미술대전(진도,2005~), 남농미술대전(목포,2006~)이 있으며, 가장 최근에 섬진강미술대전(광양,2015~)이 운영되고 있다.
미술전시시설은 설립주체에 따라 사립과 국공립시설로 크게 구분할 수 있다. 1907년 창덕궁에 박물관과 동식물원이 설치된 이후로 일제강점기에 각종 박물관, 박람회장과 미술전람회장이 등장했다. 학교 강당이나 회관 등에서도 전시가 열리기 시작했다. 1930년대에는 근현대미술 전시를 위주로 하는 화랑이 등장했는데, 서울에 위치한 삼월화랑과 화신화랑은 백화점 내에 들어선 화랑으로 전시회가 활발했다. 전남지역에서는 1920년 허백련이 목포 공회당에서 귀국전을 가졌다. 해방 후에는 광주미공보원에서 중요한 전시들이 열리기 시작했다. 1946년 목포에서 열린 제1회 녹영회전은 출품작 가운데 백영수의 누드작품에 대한 논란이 있었는데, 전시장소가 목포여중 강당이었다는 점에서 논쟁이 더욱 뜨거웠다.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방이었던 다방, 다실에서도 많은 전시가 열렸다. 한국전쟁 이후 경제원조를 받아야했던 시절에도 도시 지역에서는 다방, 은행, 회관 등 다양한 장소를 빌려 미술활동이 전개되었다. 반면 국공립시설은 뒤늦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1978년 국립광주박물관이 개관하였고, 도립시설로는 남도예술회관이 1980년에 광주에 개관했다. 남도예술회관은 2006년 도청 이전으로 폐관할 때까지 전남미술사에서 중요한 전시들이 열린 대표적인 시설이다. 2015년 기준 전남지역에 소재한 박물관은 총 46개소로 국립 2개(나주국립박물관,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공립 29개, 사립 12개, 대학 3개(목포대, 순천대, 동신대)이다. 경제성장이 본격화되었던 80연대 이후부터 정부지원으로 전국에 문예회관이 하나 둘 지어지기 시작했다. 지역 미술전시와 행사가 가장 많이 열리는 문예회관은 문화예술회관, 시민회관, 문화회관, 예술회관, 문화예술의 전당, 문화센터, 아트센터 등 다양하게 불리면서 최근까지 건립되고 있다. 전남의 경우 강진아트홀, 곡성레저문화센터, 영광예술의전당, 완도문화예술의전당, 진도향토문화회관, 화순하니움문화스포츠센터가 색다른 명칭을 사용하는 예이다. 이들 중 영암문예회관은 가장 작은 규모로 유일하게 운영을 민간(영암문화원)에 위탁하고 있다. 미술관의 경우, 조선대학교미술관이 1989년에, 광주시립미술관이 1992년, 보성군립백민미술관이 1993년에 개관했다. 2015년 기준으로 전남에 소재한 미술관은 총 22개이다. 7개 공립(전라남도옥과미술관, 노적봉예술공원미술관, 무안군오승우미술관, 보성군립백민미술관, 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 (진도)남도전통미술관, 함평군립미술관)과 15개 사립미술관(학명미술관, 남포미술관, 도화헌미술관, 대담미술관, 명지미술관, 우종미술관, 아천미술관, 영산미술관, 나절로미술관, 장전미술관, 잠월미술관, 다산미술관, 신선미술관, 소소미술관, 행촌미술관)이 등록 운영되고 있다. 이들 가운데 장전미술관(진도,1989)이 등록미술관으로서는 가장 일찍 개관한 예이며, 1993년 개관한 보성군립백민미술관은 전국 최초의 군립미술관이다. 등록되지 않은 사립 미술관의 수까지 합치면 인구에 비해 미술관의 수가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20세기 전남미술은 목포와 광주 두 지역이 큰 흐름을 주도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동부권 여수에서도 많은 활동이 있었으나 독자적이라기보다는 지역 순회전과 교류가 주를 이룬 것으로 보인다. 목포와 광주는 서로 ‘예향’의 자존심을 걸고 경쟁하였다. 두 도시간의 주도권 경쟁은 60년대 이후부터 확실히 광주 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1965년부터 시작된 전남도전과 함께 미술대학이 광주에 집중되면서 미술인구가 늘어났으며, 그로 인해 전시회의 개최도 많아졌다. 조선대의 개교(1946년)에 이어 전남대(미술교육과 1974년, 미술학과 1982년), 호남대(미술학과 1982년)를 통해 배출된 젊은 작가 층이 형성되면서 광주는 다른 전남의 도시에 비해 월등히 활력이 넘치게 되었다. 이들 미술대학은 지역미술에 새로운 활력을 제공하였고 점차 세대교체가 이루어 질수 있었다. 80년 5.18민주항쟁 이후 광주는 한국현대정치사는 물론 한국현대미술사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지역이 되었다. 그 상징성은 1995년 광주비엔날레를 탄생시켰고 세계미술계가 광주를 주목하게 되었다.
한편, 목포를 중심으로 한 전남 서남권과 나주, 화순, 담양, 장성 등 광주근교권 미술계가 목포와 광주 두 도시로 빠르게 흡수되는 동안, 전남 동부권 미술은 상대적으로 주목을 덜 받았다. 여수와 순천을 중심으로 꾸준히 독자적으로 성장해 온 동부권은 90년대 이후 활기를 띄는 광양과 결합되면서 여수-순천-광양 연합의 광역적 미술활동이 전개되기 시작했다. 최근에는 고흥까지 합류하고 있다. 20세기를 지나 2000년대에 접어들어서는 여수엑스포(2012), 순천만국제정원박람회(2013)와 같은 국제행사가 지역을 널리 알리면서, 전남미술의 새로운 동력으로 동부권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다. 게다가 2015년 도립미술관 건립지가 광양으로 확정되면서 동부권의 기세는 당분간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7.02
이명훈·박혜강 |